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민혁명당 사건 (문단 편집) == 인민혁명당은 실존했다? == 이 사건은 당시 재판에서도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 어느 한 쪽 주장을 진실이라고 증명할 방법은 마땅치 않으나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사법 역사 치욕의 날로 각인된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 때문이 아니라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아래의 발언들은 첫째, 인혁당의 실존만을 주장할 뿐 그것이 '''어째서 국가 권력으로 18시간만에 사형 집행을 마친 행위의 정당성으로 이어지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를 하지 않고''' 있고 둘째, 인혁당 실존 여부에 대한 발언마저도 '''발언의 진위 여부에 관해 일체의 교차검증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사실상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사관 측의 주장들인데 설령 뉴라이트 사관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들을 국가의 사법 살인 행위를 옹호하는 근거로 써선 안된다. 더구나 이 증언들은 모두 '''1차 인혁당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지 인혁당 "재건위"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인혁당 재건위 실존설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하면 [[지만원]]이 있는데, 지만원은 [[5.18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심지어 '''[[4.19 혁명]]'''에도 북한 간첩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즉슨 인혁당 재건위 실존설은 극우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사람 아니면 하지 않는 주장이란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 *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대학 재학 시절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된 전력이 있다. 그는 "4·19 이후에 이미 대학에서 친북좌파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선배들 가운데는 누구도 자기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고 선배로서 부끄럽다", "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으로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하는데, 과거가 있는 사람이 침묵을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등의 발언을 하며 인혁당이 실재했다고 주장했다.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39|#]] *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좌파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金正剛)은 인혁당 사건의 주범으로 기소된 도예종과 친밀했던 인물이다. 김정강이 도예종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놓은 것이 실마리가 되어 도예종이 검거됐다. 그는 <자유공론> 1995년 1월호와 1996년 8월호에 실린 회견기사에서 “인혁당은 제1차 사건 때부터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된 도예종과 교도소에서 만났을 때 도예종이 그에게 “이번에 검거되기는 했으나 법정투쟁에 의해서 승리적으로 넘어왔고 당은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전략적으로 승리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당이 재건되면 입당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출처: 정행산(1996), 「인혁당 과연 조작인가」, <자유공론>] 김정강은 이후 다른 인터뷰에서도 도예종이 형기를 마치고 나가면 전위당(前衛黨: 노동자 계급의 전위대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투쟁을 선도하는 정당)을 다시 추진하자고 자신에게 권유했다고 회상하면서, 당시 피고인들의 검찰에서의 부인(否認)작전이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출판한 서적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민혁명당(인혁당)은 당시 법정투쟁에서 성공했습니다. …검사들은 좌파사건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일제히 부인하니까, 처음에는 당황했죠.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엉뚱하게 걸려들었구나 하고 착각을 한 거지요. 그래서 그 때 검찰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결국에는 조직으로서가 아니고 고무 찬양 조항으로 유죄가 돼서 (교도소로) 넘어 왔단 말입니다.”[* 출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2001),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출판, 90~91페이지) [[http://factfinding.kr/social_events/2]]] *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좌익운동 이론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각 조직의 세부운동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안 교수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김정강(金正剛) 그룹 등 5대(大) 좌익운동 사건에 대해 듣고 경험했던 일들을 김수행(金秀行ㆍ現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박성준 등 관련자의 실명과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해 가며 공개했다. 안 교수는 “당시 수사기관에 발각돼 조사ㆍ발표된 보도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대개 사실”이라며 “한 다섯 번 정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구요|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이 가능하면 법적 테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느껴졌다]][* 구타 등의 [[고문]]은 헌법에서도 금지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형법 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심각한 범법 행위로, 법적체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법적 테두리를 지킨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10525/37502784/1|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